일제강점기 타이거 헌터라고 불리던 명사수, 100전 100패의 승리를 거두었던 장군 홍범도는 먼 타국 카자흐스탄에서 조국의 해방을 보지도 못한 채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유해가 2021년 우리나라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과거 이름 없는 의병군들의 노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홍범도 장군이 어떻게 조국의 해방을 위해 애쓰셨는지 기억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홍범도 장군과 명성왕후 시해
키가 190cm 이상의 장대한 기골로 백두산에서 뛰어난 사격 솜씨로 호랑이를 잡던 사냥꾼이었던 홍범도 장군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조선의 국모가 시해당한 날, 일제의 만행에 맞서기 위해 두 아들 15살 양순이, 11살 용환이를 포함한 68명의 산포수의병대와 함께 호랑이가 아닌 왜적 사냥을 시작했습니다. 의병대는 1년 동안 치른 전투 60번 중에서 60번의 승리를 거두며 전설을 만들어갔습니다. 호랑이를 사냥할 때 사용하던 화승총은 사거리가 50m로 대범한 심장과 뛰어난 사격 솜씨가 필요했습니다.
홍범도 장군과 봉오동 전투
의병군에게 연패한 일본군은 의병군 가족을 고문은 치사한 방법으로 의병들을 괴롭혔습니다. 이때 홍범도의 아내도 고문 중에 자결하였습니다. 두만강 끝자락에 있는 봉오동에서의 전투는 조롱박 형태의 지형을 활용하는 전략은 좋았지만, 의병대의 총알이 떨어져 상황이 불리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작스럽게 내린 우박 덕분에 일본군이 후퇴하였고, 이후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청산리 전투에서 완승하고 홍범도 장군은 완구루에서 일본군끼리 자멸전을 펼치게 하여 10전 10승을 거두었습니다.
홍범도 장군과 카자흐스탄
봉오동 전투 연해주 각지의 흩어져 있던 한인 부대를 통합하고 볼셰비키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러시아로 모여들었지만, 자유시사변으로 불리는 한인 무장세력 간의 분쟁으로 러시아 공산당의 강력한 통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홍범도 장군은 고려인 1세대와 농사를 지으며 연해주에서 터전을 일궈나갔습니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일본인과 닮았다"는 이유로 17만 고려인들은 강제로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황무지 카자흐스탄에서 성실한 고려인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부유한 땅으로 바꾸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
카자흐스탄에서 고려극장의 수위 일을 맡았던 홍범도 장군은 홍범도 일지를 바탕으로 그의 일생을 그린 연극을 무대화했습니다. 해방되기 2년 전 75세의 나이로 사망한 홍범도 장군의 유언은 해방된 조국으로 자신을 데려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78년이 지난 2021년이 되어서야 그는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정부는 건국훈장 중에서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고 대전현충원에 그의 유해는 안장되었습니다.
홍범도 거리
홍범도 장군의 항일운동을 기념하여 그가 살던 집 근처에 만든 거리의 이름입니다.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표지판에는 "이 길은 원동에서 소련 주권을 위해 온 정열을 다해 투쟁한 전설적인 장군 홍범도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라고 카자흐어와 러시아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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